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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3. 23世 〉32. <부정공>소정공휘동주묘갈명(小亭公諱東宙墓碣銘)
1. 문헌 목록 〉23. 23世 〉34. <부정공>죽포공휘기영행장(竹圃公諱基永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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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부정공>탄운선생휘학수가장(灘雲先生諱學洙家狀)
灘雲先生諱學洙家狀 先生諱學洙字聖魯號灘雲又審乎齋盖我趙以高麗侍中諱璋爲遠祖屢傳而至農隱諱元吉與鄭圃隱偰芸亭定策勳一等封玉川府院君子孫因貫焉虔谷諱瑜以麗朝副正我 太宗累徵不就諱智崙參禮道祭訪四昆季友愛尤篤築亭于謙川上扁以相好晨夕同處以盡湛樂三灘諱大春蔭勵節校尉見乙巳禍機筮遯漾碧亭與金河西白玉峰兩先生爲道義交隱德不仕高祖諱邦根曾祖諱觀燁祖諱龍奎號碁隱以孝士林上言入啓考諱鍾賢奉先以誠凡一切祭需親自看檢妣淳昌林氏昌輪女社門齋先味后安詳端重甚執婦道先生以 哲宗戊午四月初吉生于順天大龜里第自幼莊重不群望之儼然母夫人嘗曰余夢有大虎開口而前問曰汝欲殺我乎虎搖首不巳又問曰然則汝喉中有物乎虎頷之欣然遂揚臂拔之乃脛骨也因以生汝汝必爲非凡人也甫十歲學于家塾與儕輩賦詩代作恒時居多及長師宋淵齋審石崔勉菴三先生操履竪確門路正大事親至孝年十八遭外憂三年展墓不以祁寒署而或廢且丁内憂亦如之居家勤儉每月朔望必展謁家廟精處外室衣冠必整穀色必莊晝不釋卷夜不離燭先自孝經大學及吉今典籍要切處如誦己言又與二弟相友折卷分土俾奠厥居不數年仲氏水雲公優游外馳不聞消息先生物色訪還矣俄而盡傾家產先生不惜千金而報之以金友于又重建七世祖詠歸亭事巨力錦三年不果又以兩世褒旌事五年留洛竟蒙 天褒日與諸勳宰追逐唱和清韵高響皆膾炙人口若松沙奇先生漢倉宋鍾五判書南廷哲參判金綺秀參判洪淳學諸賢皆重之又陪從勉菴至泉隱寺命作長篇而題進勉翁稱之曰此詩史也甲午貨弊改革結税加計民不勝疾苦先生上疏畧曰昔有若對以盖徹而止哀公之加賦季氏爲之聚歛而有夫子之鳴皷則今湖嶺之弊瘼非哀公之加賦是季氏之聚歛也盖用不足而加賦猶可以止之況聚歛之剝民急税而肥己者乎伏惟 殿下以天縱聰明之聖首出庶物之德志民財之不傷慮邦本之不固思所以安戢之方云云次呈狀觀祭使巡祭使議政府度支府其他所屬官署次第頻繁而題内或以後期或以嘉尚而惟巡察使安鍾悳訓令丁寧快許公佈街路己而及見錄紙則巡察召還之後前觀察沒數督捀而去云云終不快題乙巳五賊作亂日兵來駐京城國内分裂淵翁殉節下京先生奔喪致祭黑衣赴京延諡勉翁被囚司令部亦治狀得吟詩曰東邊日出西邊雨當兩兵出沒村落也先生毅然中立少不動塞接待如例一境賴安日兵隊長請與筆談先生筆輪如流隊長却筆曰我井底蛙耳何敢大人君子論其高下也秋毫無犯請爲陪行先生却之庚戌無國之日治疏以進辭意切峻門子弟及和舊恐其無益於倒海狂瀾而徒貽酷禍也暗遣人索還尋知之嘆曰命也奈何因此爲崇兩眼昏翳不出外日與門人子弟左右詩書或講磨或唱和戊午仙馭賓天先生涕淚漣漣對案不食家人盡誠救之數日乃己遂設壇于家後城田嶝每月朔望一茅席一番燭一盃酒哭拜如禮三年如一日著皇壇辭以表其志庚申更取杜門洞錄乃修潤之盖斯錄也先生曾年周遊兩湖搜得各家事蹟叅之以奎章閣忠烈錄辨其異同考之以社門洞補遺錄正其詳略至是始克成編總五册丙寅夏五月偶有微恙秋七月病劇精神如常乃召家人及諸宗曰國憂未雪餘恨尚在當純白從儉言訖而卒乃十三日也門子弟用遺命以從葬于村左六世祖考生員公墓左原京鄉士友執謀致哀不可盡計春秋六十九夫人長水黃氏正言愼黙女狵村喜后莊淑有壺儀先先生四歲而生後先生十八年而卒春秋八十八墓與先生同岡異兆二子東普東悳早夭壻蔚山金玉洙孫男二人光寅在遠出爲東悳后孫壻二人光山金容復冠山任貞模光寅二女壻靑松沈相鉉陽川許沼在遠子完基餘不盡錄先生所著晚錄五卷濟南錄一卷史畧要解一卷刊行己久餘未脱藁鳴呼先生懿實之學節義之高非淺陋之所可窺測而東勳最是晚進屈膝於門下者纔六七年矣尤不敢妄議然竊求其平日言行之梗槩畧艸始終盖先生幼承忠孝家庭之緖長承師友淵源之正遂一意向上無他岐惑自少至老持之如一用功之篤也孝友兼至一必冠帶靜處一室居家之則也不計家道之豊約留洛五年闡揚先徽竟蒙天褒繼述之工也不顧時之利鈍事之成敗呈狀十二終叫 天陛救幣之方也憂國如家 上皇昇遐之日血淚潛泫設壇致哀愛君之誠也不務巧雕新奇塡實不破古句句不同篇篇異趣著述之工也鳴呼事之成敗時之窮達命也吾無如之何矣重建先亭一年三年而不成救幣除瘼一疏十狀而未復然處亂如常臨事不苟直遂其情非剛克有孚乎中者不能也信乎程夫子之言曰小而好學固可愛也老而好學尤可愛也若使先生眼睦無恙動作如常出則愛國愛君可從兩先生殉義之列八則俯而讀仰而思庶幾乎微妙之域而吾道不幸若有爲之資不得展用於世徒增志士之悲此則小子之不能無興感於今日者也抑又思之則有一種微意勉勵後進送餘年保太和以壽陽脉於社門編若干卷使七十二子之忠魂義魂怳然炳烺于萬世無窮也耶鳴呼噫噫玆所以辨論如右以備後日立言君子取捨 歲在乙未六月初九日 再從姪 東勳 謹狀 탄운선생휘학수가장(灘雲先生諱學洙家狀) 선생의 휘는 학수요 자는 성노(聖魯)며, 호는 탄운 또는 심 호제(心乎齊)라 하였다. 대개 우리 姓 趙氏는 고려시중 휘 장(璋)을 원조로 三전하여 농은 호 원길(元吉)은 정포은 설운정으로 더불어 정책훈 一등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하였는데 자손이 따라서 관향을 삼았다. 건곡 휘 유(瑜)는 고려 부정으로 朝鮮 태종이 여러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 후 지륜(智崙)은 삼예도 찰방으로 四형제와 우애가 더욱 독실하여 謙川위에 정자를 지어 相好간란 현판을 걸고 담락하였으며, 삼탄 휘 대춘(大春)은 음직으로 여절교위를 지냈으나 을사사화(乙巳)의 기틀을 보고 양병정에 숨어 김 하서, 백 옥봉, 양선생으로 더불어 도의로 사귀는 것이 되어 덕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조 휘 방근(邦根) 증조 휘 관엽(觀燁) 조 휘 용규(龍奎)의 호는 기은(碁隱)인데 고을 선비가 그의 효도함을 조정에 추정하였고 고의 휘는 종현(鍾賢)인데 지성으로 선영을 받들고 제수 일체를 친히 보살폈다. 비는 순창림씨(淳昌林氏) 창한(昌翰)의 따님으로 두문재(杜門齋) 선미(先味)의 후손인데 안상 단중하여 심히 부덕이 있었다. 철종(哲宗) 무오(戊午 一八五八)년 四月 초길일에 순천 대구리 본가에서 출생한 공은 어려서 장중하여 뭇 아이와 섞이지 아니하고 표정이 엄숙하니 모부인이 일찍 말하되 「내 꿈에 큰 범이 입을 벌리고 앞에 섰기에 네가 나를 해치려 하느냐? 범이 머리를 흔들기로 또 뭇되 그러면 네 목에 무엇이 걸렸느냐? 범이 머리를 끄덕이기에 팔뚝을 걷고서 손을 목구멍에 넣어 빼내보니 정갱이 뼈였었다. 이 꿈을 꾸고서 너를 났으니 반드시 너는 비범한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나이 겨우 一○세가 되어 서당에서 글을 배우는데 동유로 더불어 시를 지을때면 훌륭한 작품이 항시 많았고 장성하여 송연재, 심석 최면암, 삼선생을 스승으로 섬겨 조이(操履)가 견확하고 문로가 정대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는데 있어 효성이 지극한 공은 十八세에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三년 성묘를 하면서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이라 하여 게을리 한 일이 없고 또 모친상에도 같이 하였으며 집에서도 근검하여 매월 삭망이면 반드시 사당에 참알하였다. 외실에 고요히 앉아 의관을 정제하고 얼굴을 엄숙하게 하여 낮에는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밤에는 촛불 곁을 떠나지 아니하며 먼저 孝經 大學으로부터 고금 전적 緊要한 곳을 익숙하게 외우고 또 두 아우로 더불어 서로 우애하여 문권을 갈라 전답을 나누고 하여금 그 살것을 정하였는데 몇년이 안되어 중씨 수운공이 유람을 좋아하여 밖으로 나간 뒤 소식을 알길이 없자 선생이 찾아나가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가산을 탕진 하였음으로 선생이 천금을 아끼지 않고 나누어 주어 우애를 온전하게 하였다. 또 七代 조고의 영귀정 중건을 시작하였으나 사업은 크고 재력은 적어 三년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듯 양대 정문일로 五년을 유경하다가 마침내 국가에서 내려주는 포상을 받았다. 날로 모든 훈재를 추수하며 청아한 운률에 화답한 뛰어난 음률 역시 사람의 입에 으르내렸다. 송사 기선생 한창 송종오(宋鍾五) 판서 남 정철(南廷哲) 참판 김 기수(金綺秀) 참판 홍 순학(洪淳學) 제현들이 공을 추중하였다. 또 면암을 배종하여 천은사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면암이 장편을 지으라 함으로 公이 글을 적어 올리니 면암이 말하기를 이는 시사(詩史)다 하였다. 갑오(갑오 )년에 화폐를 개혁하자 결금이 가중하여 백성이 질고를 이기지 못하게 되니 선생이 상소하여 더 부과한 것을 그치게 하였는데 계씨(季氏)가 위하여 취염한 고로 부자의 울린북이 있은즉 이제 호령(湖嶺)의 병폐가 애공의 더 부과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계씨의 취염이다. 대개 용이 부족하여 더 부과한 것도 오히려 가히 중지시키는데 하물며 취염으로 백성을 베끼고 급한 세금으로 제몸을 살찌게 한 사람이겠는가 엎드려 생각하건데 전하는 하늘이 낸 총명한 성철로 머리로 하여러 물건에 덕을 베풀고 백성 재물이 소모안 될 것을 염려하며 나라 근본이 견고치 못할까 두려워하여 편안할 방법을 생각한다하고 다음 관찰사 순찰사 탁지부 기타 소속 관서에도 자주 글을 올리니 그 당시 또는 그 뒤에 가상하다는 下敎뿐이었는데 오직 순찰사 안종덕의 훈령이 정녕하여 쾌히 거리에 공포하라 하였지만 녹지를 본 바에 의하면 순찰을 소환한 뒤에 전 관찰사가 다 독촉하여 받아 갔다 운운하며, 마침내 쾌히 제사를 아니하였다. 을사(乙巳)년에 오적이 작란하여 왜병이 경성에 와서 주둔하는 등 국내가 분열하니 연재공이 순절함에 선생이 분상하여 제전을 옹리고 혹의로 서울에 가서 시호를 맞아 왔으며 면암옹이 사령부에 갇힌 뒤 석방되었다가 이윽고 대마도서 순절하니 또 분상치제하고 다 심상을 입었다. 무신(戊申)년에 의병이 일어나 민간을 탁란한고로 이른 곳마다 백성이 다 달아나 피하고 길이 막히게 설치니 선생이 시를 읊었는데, 동편에는 해가 뜨고 서편에는 비가 내리니 (東邊日出西邊雨) 비를 만나고 군사가 나와 마을이 함몰하더라 (當雨兵出沒村落也) 선생이 굳세게 중립하여 조금도 낯빛을 움직이지 않고 등록에 따라 접대하니 일경이 힘입어 편안하였다. 일병 대장이 청하여 서로 필담함에 선생 필한이 흐르는 물과 같은 것을 보고 일본 대장이 붓을 놓으며 말하기를 나는 샘속에 한갓 올챙이라 어찌 대인 군자와 그 고하를 의론하리오 하고 추호도 범하지 아니하고 그 배행을 청하니 선생이 뇌각하였다. 경술(庚戌)년 합병때 공이 소장을 써 올렸는데 그 글뜻이 준절하니 문하의 자제들 및 벗들이 꺼꾸러진 바다 미친 물결에 휩싸여 한갓 혹독한 화만 끼칠뿐 유익함이 없을까 두려워하여 가만히 사람을 보내 다시 찾아오게 하니 공이 이 사실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운명이라 어쩔수 없다 하였다. 이로 인하여 병이 되어 두눈이 멀게되자 문밖에 나가지 않고 날마다 문인 자제와 함께 좌우시서를 혹 강마하고 혹 창화하였다. 무오(戊午一八五八)년에 고종이 승하하니 선생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먹지 아니하다가 혼절하자 집안사람이 정성을 다하여 구원하니 수일후에 정신을 차려 마침내 집 뒤 성전등에 단을 설치하고 매달 삭망에 띄자리 한장 향촉 한자루 술한잔으로 예에 따라 곡배하기를 三년동안 하루같이 하였고 또 황단사를 지어 그 충성을 표하였다. 경신(庚申)년에 다시 두문동 사록을 찾아 이에 수정하니 대개 이 기록은 선생이 왕년에 양호에 두루 다니며 각 집 사적을 찾았고 규장각 충렬록을 참고하여 그 틀림이 없는가를 상고하여 두문동 보유록을 대조하여 자상하고 간략함을 교정하니 이에 이르러 비로소 능히 책을 이룸에 모두 五권이었다. 병인(丙寅)년 五月에 우연히 병을 얻어 추 七月에 위독하나 정신이 명료하여 가인 및 제종을 불러 말하기를 「국난의 치욕을 씻지 못하여 여한이 있으니 마땅히 순백색으로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하라.」 말을 마치고 졸하니 이에 十三日이었다. 문, 자제가 유명에 따라 마을 왼편 六세조고 생원공 묘소 왼편에 장사하니 경향 사우가 제문을 지어 슬퍼한자 적지 않았다. 춘추는 六十九세며 부인은 장수황씨(長水黃氏) 정언(正言) 신묵(愼黙) 녀 방촌희(狵村喜)의 후손으로 장숙한 규범이 있고 선생보다 四년 먼저 나서 선생보다 十八年 뒤에 卒하니 춘추는 八十八세로 묘소는 동강 이조였다. 아들은 동보(東普), 동덕(東悳)인데 동덕은 일찍 죽고 딸은 울산(蔚山) 김 옥수(金玉洙) 처며 손자는 광인(光寅) 재원(在遠)인데 재원은 동덕 후사로 출계하였고 손녀는 광산(光山) 김 용복(金容復) 관산(冠山) 임정모(任貞模) 처요 증손녀 청송(靑松) 심 상현(沈相鉉) 양천(陽川) 허 소(許沼) 처는 광인 녀식이요 완기(完基)는 재원 아들이며 나머지는 기록 아니한다. 선생이 저술한 만록(晩錄) 五권 제남록(濟南錄) 一권 사략요해(史略要解) 一권은 간행한지가 이미 오래요 나머지는 원고를 다 쓰지 못하였다. 아! 선생의 순실한 학문과 가장 늦게 문하에 나아가 배움을 청한지 겨우 六〜七年 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감히 망영되게 의론할 수 없으나 그러나 내가 그 평일 언행을 대단히 사모해 왔기에 그 대강을 찾아 모아 이와 같이 시종을 쓴다. 대개 선생은 어려서부터 충요한 마음은 정의에 대한 실마리를 이었고 장성하여서는 사우 연원의 바른길을 얻어 마침내 한마음으로 향상하고 다른 기혹이 없이 늙도록 유일하게 가진것은 용공(用功)의 독실함이었고 효도와 우애가 겸하여 지극하고 날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조용한 방에 앉아 마음을 가다듬었던 것은 거가한 법칙이며 가산의 빈부는 생각지 않고 五년을 서울에 머물러 선휘를 천양하여 마침내 천포를 받은 것은 계술(繼述)의 공이고 時期의 좋고 나쁨과 일의 성패를 돌아보지 않고 十二번 글을 올려 마침내 천폐에 부르짖은 것은 폐막을 구한 방도요 나라를 내집같이 근심하여 상황 빈천한 날에 피눈물을 줄줄 흘리며 단을 모아 슬퍼한 것은 인군을 사랑한 정성이며 교묘한 것을 힘쓰지 않고 진실을 숭상하였지만 법도가 같지 않고 책과 책이 다른 의미를 가진것은 저술의 공정이였다. 아! 일의 성패와 몸의 궁달은 운명이라 어쩔수 없도다 선정을 중건하며 一年 三年에 이루지 못하고 폐단을 구하고 병을 제거하려고 한 소장을 열번을 올려도 회복하지 못하였으나 난세에 처하기를 평상시처럼 하고 일을 당하여 구차함이 없이 바로 그 뜻을 이룬것은 강극한 중심을 믿지 않고는 할수 없는 일이었다. 정부자가 말씀하시기를 「젊어서 학문을 좋아한 것은 진실로 가히 사랑스럽고 늙어서 배우기를 좋아한 것은 더욱 더 사랑스럽다.」 하였으니, 만일 선생같은 분이 눈이 멀지않고 동작이 활발했더라면 나가서는 나라를 사랑하고 인군을 사랑하여 가히 양선생 순의한 반열을 따랐을 것이며, 들어와서는 엎드려 읽고 우러러 생각하여 거의 오묘한 지경에 이르렀을 터인데 오도가 불행하여 이와같이 할수 있는 특출한 자질을 가지고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한갓 지사의 슬픔을 더욱 하니 이것이야말로 소자가 오늘날에 감동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가지 숨은 뜻이 있어 후생을 면려하며 여년을 보낸것이 태화를 보존하고 양맥을 杜文篇 약간권에 오래 전하여 七十二자의 忠魂 義魂으로 하여금 황연히 만세 무궁토록 빛나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 슬프고 한스럽도다. 이에 위와 같이 말한 것은 후일 군자의 취사에 대비함이다. 재종질(再從姪) 동훈(東勳) 삼가 씀
 
1. 문헌 목록 〉23. 23世 〉32. <부정공>소정공휘동주묘갈명(小亭公諱東宙墓碣銘)
1. 문헌 목록 〉23. 23世 〉34. <부정공>죽포공휘기영행장(竹圃公諱基永行狀)